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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까지 고물이지만 나누며 삽니다

Cien 2007. 7. 11. 12:41

2007년 1월 21일 (일) 08:24   노컷뉴스

윤팔병 "팬티까지 고물이지만 나누며 삽니다"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표현처럼 이기적인 게 없습니다. 만약 내가 누구를 돕잖아요, 그럼 나는 기분이 참 좋죠. 하지만 도움 받은 사람은 어때요? 비참하고 자존심 상할 것 아니에요. 돕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 이에요. 내가 나누고 남이 나누고 하는 세상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에요.”

평생 ‘넝마주이’로 넝마 공동체를 이끌어온 윤팔병씨의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 학력이 전부인 사람, 9형제 중 여덟째로 온갖 밑바닥 삶을 겪어온 사람이다. 가진 게 없어도 배운 게 없어도 대접받는 사회,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그리하여 노동이 즐거움이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노동의 공동체, 삶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넝마공동체다.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표현으로 다리 밑의 막시스트라고 부른다. 지금은 기부와 나눔의 시민단체인 ‘아름다운 가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윤팔병 씨를 19, 20일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났다.

그의 삶이너무 진솔하고 감동적이어서 이틀 일정의 방송도 부족했다.

-선생님은 늘 40대라고 하시잖아요. 정신이 40대세요? 몸이 40대세요?

▲ “몸도 정신도 40대입니다.(웃음)”

-1940년생이시니까 올해 67세인데, 건강하세요?

▲ “네, 아주 건강합니다.”

-운동하세요?

▲ “노동이 운동이죠. 매일 가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까지 일하니까 그게 노동이고 운동이죠.”

강남서 넝마공동체 시작 바닥의 나눔살이 내운명

-윤팔병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이야기해 주세요.

▲ “제가 남을 도와준다고들 하시는데 도와준다는 말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상당히 언짢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말 대신 ‘나눈다’고합니다. 그 이상의 말, 그 외의 말은 다 거부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은 수입이 별로 없어도 굉장히 행복해 합니다.”

-넝마공동체가 자연스럽게 그런 모임이 된 거에요? 아니면 선생님이 나서서셔 그 사람들을 모으신 거예요?

▲ “제가 나섰죠. 강남이 재개발되면서 철근이라든지 고철이 천문학적으로 쏟아져 나오니깐 난지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강남으로 다 모여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소위 말하는 왕초라는 사람의 착취가 심했어요. 그걸 보고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넝마공동체를 만들어 식사비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가지는 식으로 만들어놔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죠.”

-그래서 자립해서 집도 얻고 나간 사람도 있습니까?

▲ “많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한번 기반 잡고 나간 사람들 두 번 다시 얼굴도 안보입니다(웃음). 여기 오면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이 탄로 나니깐 전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찾아오는데 기반이 잡힌 사람은 잘 안 찾아오고, 가끔 양주병이나 들고 형님 하고 찾아오겠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어요.” -가족이 오는 경우도 있나요?

▲ “그렇죠. 97,98년도 IMF때는 가족이 많이 왔었죠, 애들 데리고. 길거리에 내려앉은 사람은 어린 애들을 여기 맡기고 남편은 직장이 없으니까 노동판에 가고 부인은 식당에 가고 하다가 대부분 헤어지더라고요. 그러면 애들은 고아원에 보내버리고 헤어지는 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같이 살면서 풀어나가도록 그런 사람은 컨테이너(3X6m)를 하나 따로 줍니다. 그러다가 강남 땅값이 오르면서 눈엣가시가 돼 한 7번인가 철거를 당하고 컨테이너도 12대인가 뺏기고 못 찾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해결될 방법이 없나요? 지금 철거 돼서 쫓겨난 그분들은 어디에 계세요?

▲ “다시 서울역 지하도로 가고 쉼터로도 가고 영등포 지하도로도 가고…. 제가 전에 ‘실직자 실직자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는 대안이 있다. 서울시에서 가지고 있는 자투리땅만 우리한테 사용하게 한다면 스스로 벌어서 살 방법이 있다. 자투리땅만 준다고 해도 우리는 30만 명이 아니라 100만 명이라도 실업자를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대안이 있다. 느그 협조해라’고 말했었지요. 앞으로는 저한테 대안이 뭐냐 사는 방법이 뭐냐 찾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9형제중 여덟째라 팔병

-십남매시던데요?

▲ “제일 큰 누나가 한 분, 그다음에는 전부 아들입니다.”

-그럼 윤팔병 선생님은 8째세요?▲ “네. 사병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중간에 윤우병 하고 계속 오병 육병… 동생이 구병이죠. 윤구병.”

-형님들이 소위 말하는 좌익을 하셨다고 하는데.

▲ “(형님들이) 많이 참여를 했어요. 이론가로 머물지 않고.”

-몇 분이나 그러셨어요?

▲ “저랑 구병이만 빼 놓고 일곱 형제들이 어릴 적부터. 제 바로 위에 형이 서울 지하실에서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몰라요. 형들 찾아내라고, 말하라고. 그래가지고 13살 먹은 사람이 한 달 이상 호되게 고문을 당하고 정신병자 돼서 자살하고…. 저랑 구병이만 남았지요. 어머니는 권총에 맞으실 뻔 하기도 하고.”

-헌책방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 “친척들이 돈을 모아줘서 구병이 집 근처에 방 있는 가게를 하나 얻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고물장사들이 책을 많이 갖고 가더라고요. 그걸 1kg당 40원 받는다고 해서 100원 준다고 하니까 전부 우리 집에 갖고 오더라고요. 저는 자전거를 중고로 하나 구입해서 책 모으느라 해가 뜨면 나가고 해가 지면 들어왔어요, 책방은 아내가 보고. 책꽂이도 없어서 다 주워서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우리 집에 사회과학 서적이 많다는 소문이 나서 78년부터 학생들이 많이 오면서 아지트가 됐어요. 그때 시대가 시대니까 급하면 도망가라고 뒷문도 만들었지요.”

-지금 입고 계시는 옷은?

▲ “팬티까지 고물이지요. 애엄마는 죽어도 남이 버린 팬티는 못 입겠다고 했다가 요새는 그냥 삶아서 입어요.”

-앞으로 넝마공동체는 어떻게 운영하실 건가요?

▲ “넝마공동체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끝날 때까지 안고 같이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야죠. 저는 상류층에 편입하기는 포기했어요. 내 문화, 힘들게 사는 문화를 사랑하고 그게 좋아요. 배운 사람들은 상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우리가 하는 욕 속에서 정겨움이 묻어나고, 편안해요.”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데일리노컷뉴스 정리=이승호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