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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기사모음-

[스크랩] 40년 전, 라면 4박스 들고 보육원 찾은 청년 일흔 넘은 올해도 찾아왔습니다

40년 전, 라면 4박스 들고 보육원 찾은 청년 일흔 넘은 올해도 찾아왔습니다
http://media.daum.net/v/20121024030904330

출처 :  [미디어다음] 인물 
글쓴이 : 조선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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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좀 일찍 왔어요. 추위가 빨리 온다고 해서요."

22일 오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삼동소년촌'. 갓난아이부터 고등학생까지 70명의 고아가 자라고 있는 이곳에 때 이른 '산타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남대문과 명동시장에서 30여년간 구두 상점을 운영했던 이상차(71)씨. 1972년 12월 소스라치게 추웠던 어느 겨울날, 이씨는 지금 위치에서 1㎞쯤 떨어진 한강의 샛강 옆 언덕에 있던 삼동소년촌을 처음 찾았다. 라면 네 박스를 기부한 그는 이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았다. 올해로 40년째. 지난해 복지단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고액 기부자 모임 '나눔리더스클럽'을 발족하며 창단멤버 25인 중 이씨를 '최장기(最長期) 기부자'로 선정했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에도 이씨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라면과 양말, 칫솔과 치약 등 생필품 위주였던 기부 품목도 시간이 지나 학용품과 보온내의 등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

↑ [조선일보]22일 오후 ‘삼동소년촌’ 2층에 있는 ‘평화방’을 찾은 이상차(71)씨가 서너 살 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이씨는 이날 기자에게 “아이들 얼굴이 나오면 곤란하니 뒷모습으로 찍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 [조선일보]1972년 명동시장에서 구두를 팔던 시절의 이상차(당시 30세)씨(위). 이씨는 이 무렵부터 삼동소년촌을 방문해 40년간 기부활동을 해왔다. 아래 사진은 지난 1975년 이상차씨가 삼동소년촌에 양말과 치약, 칫솔등을 기부하고 받은 인수증. /이준우 기자

연두색 점퍼를 입은 이씨가 입구에 들어서자 몇몇 중학생 아이들이 이씨를 알아보곤 "할아버지,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지냈지?" 이씨가 아이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 동안 42년째 이곳을 이끌고 있는 김종원(여·76) 원장이 사무실에서 뛰어나왔다. 이씨는 100여만원이 든 흰 봉투를 건네며 "애들 춥지 않게 잘 써달라"고 당부했다.

이씨가 이곳을 찾은 40년 동안 1000여명이 삼동소년촌을 떠나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그중엔 이씨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삼성그룹의 임원이 된 강중희(가명·51)씨는 "어렸을 적 아저씨가 학용품을 주시며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부자가 되겠다'고 하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꼭 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줬다"고 기억했다. 변호사가 된 김영민(47)씨는 "30여년 전 겨울, 발목까지 눈이 내려 도로가 끊긴 날 아저씨가 귤 박스를 머리에 이고 오셨었다. 그때 새하얀 눈밭에 새겨진 아저씨의 선명한 발자국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김씨는 "아저씨 도움으로 성공했으니 이젠 아저씨처럼 베풀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곳 출신 중 몇몇은 이씨의 뒤를 이어 삼동소년촌의 새로운 후원자가 됐다.

"내가 겪어봤기 때문에 가난이 얼마나 서러운지 잘 압니다."

이씨는 6·25 전쟁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아홉 살 때부터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씨의 어머니는 서울 곳곳을 떠돌며 파출부 일을 했다. 밥 한 공기를 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끼로 나눠 먹는 일이 잦을 정도였다.

'죽기 살기로' 구두를 팔아 성공을 거둔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 겨울 "춥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싶다"며 삼동소년촌을 찾았다. 200평 정도 되는 작은 단층 건물에는 50여명의 고아들이 뒤엉켜 살았다.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아 아이들이 이불 속에서 코를 훌쩍였고, 비가 올 때마다 천장에서 물이 새 아이들이 밤새 잠을 설쳤다. 이씨는 내복과 이불도 기부했고, 보일러도 설치해줬다. 여름엔 수해를 입지 않도록 직접 배수로 설치 작업도 했다. 먹을 것은 김치와 나물뿐이었던 당시 이씨가 갖다 준 라면은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였다. 김 원장은 "그땐 라면도 정말 귀했다"며 "아이들이 뜨거운 면을 훅훅 불어가며 먹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선생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15년 전 구두 상점을 그만둔 뒤 그는 독거노인 70명에게 매달 쌀 10㎏씩 기부하는 일을 새로 하고 있다. 15년째 그는 건물 임대료 등 한 달 수입 400여만원 가운데 절반을 쌀값에 쓰고 있다. "나이 먹고 보니 나와 비슷한 노인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어린 고아를 돕고 있으니 늙은 노인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지." 올해부터는 젊은 기초생활수급자들 20명도 추가로 뽑아 쌀 10㎏씩을 주고 있다. 이씨는 "나이 들어 눈은 자꾸 어두워지는데도 어려운 사람들은 더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이씨는 3~4세 미취학 아동이 있는 2층의 '평화방'을 찾았다. 7명의 아이들과 차례로 손을 맞잡은 이씨는 "할아버지, 재밌는 이야기 해주세요"라는 아이들의 말에 '토끼와 거북'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희들 잘하는 노래를 한번 해봐." 이씨의 말에 아이들은 '올챙이송'을 불렀다. "개울가에~올챙이 한 마리~꼬물꼬물 헤엄치다…."

"기부를 한다고 내가 가진 게 줄어드는 법은 없어요. 보세요, 오히려 부자가 되지요. 이 기사 보시는 분들 당장 만원부터라도 한번 기부해보세요." 이씨가 기자에게 꼭 써달라고 부탁한 '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