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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세계로-

서른 코앞에서 파일럿 도전…

 

"하고 싶은 일이라고 무작정 뛰어들지 마세요.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살던 집 팔고, 여기저기 돈 빌려서 새 사업 하는 사람 수두룩 봤어요. 그때마다 너무 무모하다 싶어요. 지금 하는 걸 유지한 상태에서 해 보고 싶은 걸 시험 해보세요. 그런 다음 확신이 드는 쪽으로 옮겨 가도 늦지 않아요."

뜻밖이었다. 29세에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 항공학교로 떠나 바닥부터 공부, 35세에 중국 최초의 한국인 여성 파일럿이 된 그녀. 그래서 그녀라면 누구보다 확신을 갖고 '무엇이든 달려들어 시작하라'고 조언할 거라 생각했다. '반전' 있는 대답을 들려준 그녀는 중국 상하이의 지샹(吉祥)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파일럿조은정(40)씨다.

↑ [조선일보]“서른세 살 때 미국 항공학교로 유학 갔을 때 제 나이가 제일 많을 줄 알았어요. 근데 전체 학생 중 절반은 제 또래거나 저보다 나이가 많더라고요.”18일 오후 서울 정동에서 조은정 기장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명원 기자

중국 최초 한국인 여성 기장

'파일럿'이란 직업을 30대 중반에 쟁취한 조씨는 20대 대학생과 30대 직장인 사이에서 특히 인기 만점인 '파워 롤모델'이다.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녀는 생애 첫 책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행성: B잎새 펴냄)과 함께였다.

미술 교사가 되겠다고 한양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조씨가 파일럿을 꿈꾸게 된 건 2001년 3월의 일이다. 서울 힐튼호텔에서 체크인 업무를 보다가 50대로 보이는 여성 기장이 두 명의 남성 부기장을 뒤에 거느리고 호텔 정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충격과 설렘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 나이가 됐을 때 나도 그녀처럼 누군가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여성 기장이 체크인을 하는 짧은 순간을 놓칠세라 어떻게 파일럿이 됐느냐고 물었다. 미 공군 부대 안에 있는 에어로클럽에서 비행을 배웠다고 했다. 그때부터 조씨는 파일럿들을 체크인·체크아웃시킬 때마다 한 명씩 붙잡고 물어봤다. "어떤 학교를 가서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그렇게 물어본 파일럿이 100명은 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의 꿈

"기집애가 무슨 파일럿이냐? 착실히 돈 모아 시집이나 가거라!" 파일럿이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인들도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어이없어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여성을 받아줄 조종학교도 국내에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경기 오산 미군기지에서 경비행기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토머스 허버드 대사 부부의 비서로 일하면서 기지 출입증을 얻었다. 1년간 경비행기 조종을 배웠고, 2004년에는 미 델타항공 비행교육원으로 유학 가 전문 파일럿 교육을 받았다. 교관자격도 땄다. 마침 항공산업이 급팽창하고 있던 중국은 항상 교관이 부족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네이멍구 바오터우에서 중국인들을 가르쳤다. 조씨는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했다. 조씨가 최고로 많이 받아본 상은 개근상. 그때도 성실함이 빛을 발했다. 2007년 해당 학교의 고문이 그녀를 신생 항공사인 지샹항공에 추천했다.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파일럿이었다.

서른아홉의 비행

집안이 넉넉해서 그 나이에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땅부자'였지만 자린고비였어요.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어요. 그래도 기장이 된 걸 가장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분이 아버지예요."

조씨는 자신의 성공 요인으로 '꼼꼼함'을 들었다. "저는 새 직장이 정해져야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어요. 미국에 유학 갈 때도 후보 학교 세 군데를 꼽은 뒤 교수와 재학생을 인터뷰했어요. 제대로 모험을 하려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합니다."

파일럿의 일상에는 늘 하늘이 있고 비행이 있다. 하늘에서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느냐고 물으니 조씨가 답했다. "엄마 생각."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큰 병원에 검사받으러 간다고 나간 엄마는 그 길로 숨을 거뒀다.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 보면서 저 별 하나에 우리 엄마 살까, 지금 내 모습 보고 있을까…." 조씨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