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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광장-

[스크랩] 신사임당

    출생과 성장
    출생과 성장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시·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 (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blue3_1.gif

    출가후의 생활
    출가 후의 생활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blue3_1.gif

    자질과 재능
    자질과 재능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외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 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blue3_1.gif

    그림과 글씨
    그림과 글씨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blue3_1.gif

    예술적 환경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그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blue3_1.gif

    후손과 작품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blue3_1.gif

    참고문헌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燃藜室記述》, 《栗谷全書》
      孫仁銖, 《申師任堂의 生涯와 敎育》, 博英社, 1976.
      李東洲, 《韓國繪畵小史》, 瑞文堂, 1972.
      李秉岐, 〈申師任堂〉, 《朝鮮名人傳》, 朝光社, 1947.
      이은상,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 1957.
      李殷相, 〈申師任堂〉,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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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   1 5 0 4 ~1 5 5 1

 

  

조선시대 여류문인, 서화가 신사임당은 호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어머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 하고 자수(刺繡), 바느질, 솜씨가 좋았으며 특히 시와 그림에 뛰어났다.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예술(藝術)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훌륭한 효녀로서, 훌륭한 어머니로서, 또 어진 아내로서 우리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자녀교육은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정성된 힘이 매우 크다. 자기자식이 공부 잘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자녀되기를 누구나 원한다.

그러나 정성과 마음만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즘에는 국가교육기관, 많은 교육학자, 수많은 교수 및 교사가 있어 교육목표가 뚜렷이 세워져 있고 또 각 사설 학원도 있고 부모들도 수준급(水準級) 교육 이수 자이지만,
그시절은 자녀교육 체계가 뚜렷하지 못했으며 부모들도 그의 문맹자(文盲者) 이었습니다.

특히 여자 교육은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신사임당은 자아개발(自我開發)을 완성하여 체계(體系)가 확실한 목표를 세워 인간적인 인재(人才)를 길러내는 가공(可恐)할 만한 일을 해 낸 것이다.

 

 오죽헌 그림
             

   

  1920년 김경수가 그린 오죽헌 전경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 온 집이었던 것을 무남독녀 이씨 부인이 상속 받았다. 이씨 부인은 서울  신명화공과 결혼 다섯 딸을 두었으니 그중에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서울 이원수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이곳 친정에서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선생은 이 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외조모 이씨 부인이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분재기 에 따라 율곡의 이종 제 권처균 에게 상속되었으며, 오죽헌이란 명칭은 집 주위에 오죽이 많아 권처균의 아를 오죽헌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것이다.

 1788년 율곡선생의 친필 격몽요결 과 벼루를 보관하는 어제각을 건립하였다. 1961년 11월 제1회 율곡 제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 매년 10월에 봉행 하고 있다. 오죽헌은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백과사전 검색결과               

신사임당[申師任堂]

 

 

 

                                  

 

 

 

신 사 임 당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의 북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영리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몇달 후, 어머니께서 앎아 누으셨다. 정성껏 어머니를 보살펴 어머니께서 좀 나으셨다. 사임당이 글공부를 하다가 방안에 둘러친 병풍에 눈이 멀어 사암당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겨우 7살밖에 되지 않은 사임당은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임당은 여자의 의무 삼종의지 같은 것을 잘 외우고 글을 너무 잘 읽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꼐서 내려오신 소식을 듣고 사임당은 옷을 만들었다. 그옷은 감탄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감동시켰다. 인선이는 19살 꽃다운 나이의 결혼을 하였다. 사임당이 서른 세살이 던 해 용꿈을 꾸어 아이 율고을 나았다. 사임당이 마흔 일곱 되던해 병이 들었다. 1551년 5월 17일 신사임당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되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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