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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세계로-

"한국어도 돈되는 수출상품이지요”

2007년 7월 19일 (목) 10:09   세계일보

[이사람의 삶] "한국어도 돈되는 수출상품이지요”


“한글을 수출하면 돈이 될 수 있을까?”

배재대 정순훈(56) 총장은 2004년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외국에 현지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기관을 만들면 학생도 모이고 수익도 발생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결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4년도 채 안 된 지금 그는 6개국에 27개의 ‘배재 한국어교육센터’를 설립해 3000여명의 외국인에게 우리글을 수출하는 ‘한글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연세대에서 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4년 배재대 교수로 부임한 정 총장은 20여년간 평범한 법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한글에 대해 모국어 이상의 애착이 있었다거나 가족이나 주위에 국어학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한글에 승부를 걸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국어’라면 ‘한국어’는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영어나 일본어처럼 외국에도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을 법한데 제대로 가르칠 교사나 프로그램이 전혀 없는 거예요.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등 환경 변화를 잘 활용하면 대학 수익사업으로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전국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를 개설한 정 총장은 곧바로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유명 대학을 순례하며 한국어교육센터 설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배재대에서 전문 교사를 양성한 뒤 이들을 현지 대학에 파견해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올림픽까지 치렀지만 한글을 국제어로 인정하는 대학은 거의 없었다. 국내에서조차 “외래어에 밀려 고전하는 한글을 외국 대학에서 가르치는 게 가능하냐”며 헛수고로 치부했다.

하지만 언어가 경제나 문화의 흐름에 민감하다는 그의 생각이 확인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값싼 노동력을 찾는 해외 진출 기업이 봇물을 이루고 해외관광이 활성화되면서 경제·문화적 소통 도구로서 한국어의 필요성이 급부상한 것이다. 때마침 한류 열풍도 가세했다. ‘한국 기업에 취업하려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익혀야 유리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퍼지면서 중국과 동남아 지역 대학을 중심으로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중국 구이저우대학의 경우 처음에는 시큰둥해하다 최근 한국 관광객이 늘자 교육센터 설립을 사정하기도 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3만개에 고용인력만 100만명이 넘습니다. 우리 기업을 최고의 직장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바로 의사소통 능력입니다.”

“오늘날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효율적인 비즈니스 국가로 자리 잡은 것도 알고 보면 경제력을 쥐고 있는 영어권이기 때문”이라는 정 총장은 “영어나 일본어처럼 국가가 나서지 못한다면 대학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2004년 말 중국 시안외국어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설립된 교육센터는 모두 27개. 특히 중국에는 31개 성 전역에 한 곳 이상의 교육센터 운영을 목표로 현재까지 19곳이 문을 열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중국과 러시아, 알제리, 몽골 등을 4년간 50여차례나 방문하는 강행군을 펼친 결과였다. 그 후유증으로 당뇨를 얻어 고생하고 있다.

배재 한국어교육센터의 강점은 모두 현지 대학 안에 센터를 세우고 정식 학과목으로 개설해 안정적이면서도 설립·유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 배재대는 강사와 커리큘럼만을 지원하고도 수강료의 절반을 분배받고 있다.

이 돈은 교육센터 출신으로 배재대에 유학하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모두 재투자된다. 그 결과 이곳에서 한국어를 익힌 상당수가 배재대로 유학해 올 1학기 전교생의 10%가 넘는 700여명을 유치했다. 배재대 한국학과도 석·박사 과정까지 신청자가 몰리는 전국적인 인기학과로 부상했다.

지난 5월 비국어학자로는 이례적으로 국립국어원 산하 한국어세계화재단 이사장에 선출된 정 총장은 장기적으로 교육센터를 100개로 늘린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내년까지 카자흐스탄, 멕시코, 일본 등지에 교육센터를 추가로 세워 모두 50개로 늘리기로 하고 현지 대학과 설립 절차를 진행 중이다.

올해부터 4년간 100개 개발도상국의 우수한 젊은이 한 명씩을 뽑아 한국어 교육과 국내 유학을 알선함으로써 국제적 한국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야심찬 계획도 시동을 걸었다.

한국어를 매개로 한 이 꿈이 실현되면 한국어 교구나 교재 수출은 물론 일본의 APU(아시아태평양대학)처럼 유학생이 재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활보하는 글로벌 대학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청사진이다.

“전 세계에는 1만개가 넘는 언어가 있지만 문자로 사용되는 것은 24개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키지 않고, 남들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언어도 도태된다는 뜻이죠.”

그는 “이제 애국심에 호소해서 우리글을 지키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면서 “한글이 돈 되는 산업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국제어로서 진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전=임정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