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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광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이야기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청량산 자락에 거대한 성이 있습니다.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갖춘 남한산성이죠. 인조 임금이 병자호란 때 47일간 항쟁을 벌인 후 항복했지만 실제로는 오랜 세월 동안 적에게 함락되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2000년부터 꾸준히 복원사업이 이뤄진 결과 현재는 400년 전 난공불락의 요새 모습을 되찾았어요. 외부와의 전쟁이 치열했던 살아있는 박물관인 남한산성에 소중 학생기자가 찾아갔습니다.

↑ 1. 장창희 학생기자가 수어장대를 둘러본 후 내려오고 있다.

↑ 2 남한산성행궁 뒤로 70~90년 넘게 살아온 적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3 행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지. 남한산성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인조·숙종·영조·정조 등 각 시대별 성벽의 흔적이 모두 남아 있어 축성술의 발달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던 지난 25일, 남한산성에 남아 있는 왕의 발자취를 느끼기 위해 장창희 학생기자가 이곳을 찾았다. 둘러보게 될 첫 번째 장소는 남한산성행궁이다. 인조·영조·정조·고종 등의 왕들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한 곳이라 멀리서도 위풍당당한 형태를 뽐내고 있었다. 과거에는 상궐 72.5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6.5칸의 규모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불타 없어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년 전에 복원했다.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에 다가서자 황연정 해설사가 학생기자를 반긴다. "한남루는 한강 남쪽에 있는 누각(2~3층으로 지어진 한옥)이란 뜻을 가진, 행궁의 입구예요.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의 큰 문은 왕이 다니던 문이랍니다."

정조 22년(1789년)에 광주유수 홍억이 만든 한남루는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따라 성 안의 무기고가 파괴되며 함께 불탔었다. 현재의 한남루는 과거 모습 그대로 복원된 상태다. 왕이 다니던 커다란 문과 양 옆으로 작은 문 2개가 나란히 배치됐고 문 위로 자리한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면에는 앞뒤로 4개씩 큰 돌기둥이 있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니 돌기둥의 색이 조금씩 달랐다. 앞쪽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뒤쪽과는 달리 거무스름한 색이었다. 400년 전 조선시대 당시 사용됐던 기둥 재료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행궁이 복원되기 전까지는 기둥들이 인근 학교 정문이나 음식점 정원에 장식용 재료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기둥 곳곳에는 6·25 전쟁 당시의 총알이 스쳐간 흔적도 남아 있어 세월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남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왕의 생활공간인 내행전이 나타났다. 전쟁과 같은 비상 시에 궁궐로 쓰였기 때문에 나랏일을 보는 사무 공간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잠을 잘 수 있는 침소가 배치돼 있는 구조다. 대청에는 왕이 거처하는 곳에만 놓던 일월오봉도 병풍과 왕이 앉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왕이 잠을 자던 방 옆에 또 다른 방이 있네요. 조금 답답해 보이는 것 같아요." 장 학생기자가 침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침소 옆은 복도식 구조로 돼 있었는데 방 2개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왕의 시중과 호위를 담당하는 신하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랍니다. 내행전은 담으로 사방이 둘러져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있어요. 암살 등의 외부 위험요소로부터 왕을 지키기 위해서죠." 황 해설사가 웃어 보였다.

남한산성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숲이 우거진 산을 뒤로 한 채 강과 탁 트인 농경지를 바라보고 있어서다. 내행전을 지나 행궁의 뒤쪽으로 나가자 푸른 소나무숲이 펼쳐졌다. 남한산성은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노송(늙은 소나무)집단이 형성된 장소다. 70~90년 넘게 살아온 적송(붉은 소나무)들이 수어장대와 서문, 행궁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다.

시원한 소나무 숲을 지나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자 길게 펼쳐진 성벽 안쪽으로 수어장대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장대는 2층의 누각에서 적군을 사방으로 내려다보며 깃발이나 북, 꽹과리 등으로 병사들을 지휘했던 곳이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지만 현재는 수어장대 하나뿐이다. 2층을 바라보자 '무망루'라는 한자가 적힌 현판이 보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돌아가셨어요. 이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이름이 무망루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청량당이다. 청량당은 남한산성 동남쪽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이 모함으로 죽음에 처해진 것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청량당 안쪽 뜰에는 '매바위'라 이름 붙여진 돌이 있다. 이회 장군이 죽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마지막 모습을 슬프게 바라봤다는 이야기가 얽힌 바위다. "매바위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해요." 가만히 손을 얹고 소원을 비는 것으로 체험을 마쳤다.

글=김록환 기자 , 동행 취재=장창희(용인 대일초 5) 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