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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광장-

"우리도 힘 보태자" 소녀상 만든 소녀들

4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 길 가던 시민들이 새로 생긴 조형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전날 제막식을 한, 단발머리에 한복을 입은 소녀의 동상이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얼굴은 앳된 10대인데, 동상의 그림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것으로 조각해놨다. 시민들은 동상 옆 바닥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과 현재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 동상엔 특별한 점이 있다. 고등학생들만의 힘으로 세웠다는 점이다.

고등학생들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다.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이화여고 2학년 윤소정(왼쪽)·권영서양. [박종근 기자]
고등학생들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다.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이화여고 2학년 윤소정(왼쪽)·권영서양. [박종근 기자]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이화여고 2학년 권영서·윤소정(18)양을 동상 앞에서 만났다. 권양은 “지난해 우연히 수요집회에 갔다가 할머니들로부터 피해 사실을 직접 듣고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린 우리가 움직이면 어른들은 뭔가 더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소녀상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두 학생은 교내에 “동상 건립에 동참하고픈 학생들은 5000원씩만 기부해 달라”는 대자보를 붙였다. 페이스북을 통해 동문·학부모 에게도 호소했다. 종잣돈 500여만원이 모였다. 그걸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나비 배지’를 만들어 개당 2000원에 팔았다. 무작정 다른 고등학교 학생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53개 학교에서 학생 1만 6000여 명이 배지를 사줬다. 온라인으로도 판매했다. 권양은 “배지 한 개를 사고 2만원을 주면서 ‘나머지는 학생들이 잘 써 달라’는 어른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30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문제는 동상을 세울 부지 마련이었다. 세종대로에 있는 서울시 옛 청사(현 서울도서관) 사용을 문의했으나 서울시 측은 “취지는 좋지만 다른 동상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서울시가 지난 8월 철거한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부지도 알아봤다. 부지를 내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 옆 공터도 알아봤지만 문화재청의 허가라는 행정 절차에 막혔다. 마지막 희망으로 문을 두드린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길이 열렸다.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는 즉시 사제회의를 소집해 부지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소녀상은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일반 소녀상과는 다르다. 손을 높이 든 채 서 있다. 소녀상에 보다 힘찬 모습을 담고 싶은 고등학생들의 바람이 들어가 있다.

 두 학생도 제막식 전날(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피해 문제가 논의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전쟁과 상관없는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위안부 문제를 짐으로 남겨선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인 데 대한 생각을 물었다.

 “우리나라가 한 역사의 잘못은 우리 세대가 안고 가는 게 맞는 거잖아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해줄 문제인가요?”(윤양), “지금 제대로 사죄를 안 하는 게 미래 세대한테 더 짐이 될 걸요.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지금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독이 돼서 돌아올 거예요.”(권양) 열여덟 소녀들도 알고 있는 정답이었다.

글=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