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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광장-

"私교육으로 떼돈 번 자괴감.. 빚 갚으려 창업·장학 재단 설립"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이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본사 인터넷 강의 스튜디오에서 오랜만에 분필을 잡고 강의를 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

1999년 가을 어느 날 새벽 1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강남대일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친 손주은(당시 38세) 강사에게 학부모라며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의 어머니라고 소개한 그 여성은 손 강사에게 케이크를 선물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며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강의 때문에 아이 성적이 많이 올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던 손 강사는 뒤이은 학부모의 말에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학부모:“선생님, 감사합니다.”

손 강사:“아, 네, 아이가 성적이 많이 올랐나 보죠?”

학부모:“네, 성적도 오르기는 했지만, 더 감사한 일이 있어서요.”

손 강사:“네?”

학부모:“대치동에 살 형편이 안 되는데 아이 교육 때문에 무리해서 은마아파트를 샀거든요. 그런데, 글쎄 6개월 사이에 아파트 가격이 3억 원이나 올랐지 뭐예요. 선생님 강의 수업료 40만 원(3개월) 내고 3억 원을 번 셈이니, 선생님께 너무 감사할 수밖에요. 호호호.”

손 강사는 머리가 멍했다. “아, 내가 또 문제를 일으켰구나”하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소위 강남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 됐다는 죄책감에 그는 몸서리를 쳤다. 손 강사가 메가스터디를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에서 만난 손주은 회장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안 태어나는 게 제일 낫겠다”고 할 정도로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다는 괴로움에 스스로를 책망하는 말을 되뇌었다.

사실, 그가 사교육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배경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가을, 교통사고로 어린 두 아이를 잃었다.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손 회장은 학원 강의에 매달렸다. 미친 듯이 일했다.

“일주일에 60시간 수업을 했습니다. 강남에 사는 부잣집 애들을 일주일 내내 오라고 해서 새벽 4시까지 강의를 했어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했으니, 성적이 올라갈 수밖에 없죠.”

손 회장의 회고다. 그렇게 그는 1990년대 연봉 50억 원의 ‘신화’를 썼다. 그것도 잠시, 손 회장의 뇌리에는 끊임없이 ‘비정상적인 사교육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자괴감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은마아파트 학부모로부터 받은 ‘충격’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신의 강의를 모든 학생이 ‘저렴한 가격’에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한때 시가총액이 2조 원을 넘었던 메가스터디는 그렇게 탄생했다.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손 회장이지만 ‘빈부 격차’와 ‘부의 세습’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시장은 규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가 정당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자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깨끗한 기업인이 되는 게 해결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었지만, 저렴한 대중강의를 하면 서울에 있는 돈 많은 학생이나, 시골에 있는 학생이나 모두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 회장은 메가스터디를 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월 사재 300억 원을 털어 청년창업을 돕는 ‘윤민창의투자재단’도 설립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윤민(潤民)’이 이름을 붙여 만들었다. 청년 인재 발굴과 창업을 이끌고 지원하기 위해 돈을 쓰겠다고 손 회장은 말했다.

손 회장이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한 것은 결국 자신의 ‘과거’에 대한 마음의 ‘빚 갚음 용’이다. 그는 “비정상적인 사교육 열풍에 ‘제일 쉽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다”며 “공부가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며 가르친 제자들, 그 친구들 때문에 나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정작 그 친구들은 성장해서 취업난에 시달리며 나에게 돈을 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그 제자들에게 항상 가슴 한편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준 그들, 그들의 돈으로 부자가 됐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에게 투자한 만큼 삶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늘 손 회장을 짓눌렀던 것이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학과만 가지 말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힘쓸 수 있는 학과를 가라고 권고했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결국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런데, 내 말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지금 취직도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모습에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아무것도 못 한 채 인생이 끝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늘 그를 쫓아다녔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타락하고 부끄러운 인생이 돼가고 있다고 느끼던 때,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기꺼이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재단 설립 외에도 손 회장의 메가스터디그룹은 올해까지 350억 원가량의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지원해 오고 있다. 손 회장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낸 세금만 해도 500억 원이 넘는다. 이 모든 것은 비정상적인 사교육 현상을 통해 부를 쌓았다는 그의 ‘부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 때 주인 할머니를 속이고 떡볶이 몇 개를 더 집어 먹었던 ‘죄책감’ 때문에 고등학생이 돼 할머니를 찾아가 기어이 ‘돈’을 돌려줬던 그의 양심이 그를 가만두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이런 양심이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이 앞서더라’는 시인 서정주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윤동주를 좋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본의 기업인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을 존경한다고 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혼다 쇼이치로(本田章一郞)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기업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연 매출 5조 엔이 넘는 세계 최고의 세라믹회사 교세라를 세웠지만, 회장 자리를 미련 없이 내려놓고 스님이 돼 많은 기업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손 회장도 자기 재산의 90%는 ‘남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호사스럽게 밥을 먹는 것도 싫어한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메가스터디를 넘겨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두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손 회장은 다시 딸과 아들 두 아이를 가졌다.)

“적어도 나 자신, 이중 인격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압니다. 윤민창의투자재단은 조금 덜 부끄러울 수 있는 길이 뭔가를 생각하며 작성했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1호’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를 읊조리며, “윤동주가 왜 ‘괴로웠던 사나이/幸福(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는가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하는 손 회장의 말에서,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인터뷰 동안 어딘지 모를 슬픔이 들어찬 그의 눈을 보면서 기자이기 전에 자식을 둔 부모로서, 아이들을 먼저 떠나 보낸 아버지의 슬픔과 공허함이 스스로를 ‘부끄러운 삶’이라는 울타리에 가둬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안쓰러움이 들었다.

인터뷰 = 임대환 차장 (사회부) hwan91@munhwa.com